오르반의 마지막 충신인 대통령이 쫓겨났다
헝가리 의회가 오르반 전 총리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슐리요크 대통령의 파면 절차에 들어갔다. 여당은 '권위주의 잔재 청산'이라 하고, 야당은 '또 다른 독재의 시작'이라 맞선다.
7월 13일 헝가리 국회 본회의장. 대통령 타마시 슐리요크가 앉아야 할 자리는 비어 있었다. 오르반 전 총리의 충신으로 꼽혀 온 인물이다.
그와 옛 여당 의원들은 아예 회의장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139명의 손이 올라갔다. 반대는 단 6표.
표결 결과가 발표되자 여당석에서 기립박수가 터졌다. 16년을 지배했던 한 정치 세력의 마지막 흔적이, 표결 한 번으로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무슨 일인가
표결로 대통령을 끌어내리다
헝가리 의회가 7월 13일 대통령 파면안을 통과시켰다. 17차 개헌안 형태였고, 찬성 139표에 반대 6표였다.
파면 대상은 타마시 슐리요크 대통령이다. 헌법재판소장 출신으로 2024년 2월 대통령에 올랐고, 빅토르 오르반 전 총리의 충성파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이번 개헌안은 헌법재판소장 페테르 폴트의 임기도 함께 끝낸다.
파면만이 아니었다
이번 개헌은 대통령 파면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훨씬 큰 패키지의 일부다.
여기에는 사법개혁, 반부패 조사기구 신설, 국회의원 12년 임기 제한이 함께 담겼다. 임기 제한은 현 피데스 의원 절반 이상에 해당한다. 마요르 정부는 이 패키지를 ‘숙청의 불꽃 작전(Operation Cleansing Fire)‘이라 부른다.
슐리요크에게 남은 선택지
슐리요크에게는 5일이 주어졌다. 그 안에 개헌안에 서명하거나, 헌법재판소에 회부해야 한다.
거부하면 의회가 곧바로 탄핵 절차에 들어간다. 그 경우 직무는 즉시 정지된다. 피데스 의원들은 표결 전 본회의장을 집단 퇴장했다.
이 사건의 배경
16년 집권의 끝, 4월 총선
모든 것은 지난 4월 총선에서 시작됐다. 16년간 집권한 오르반의 피데스(Fidesz)당이 참패했다.
승자는 페테르 마요르가 이끄는 티서(Tisza)당이었다. 티서당은 개헌이 가능한 의회 3분의 2 의석을 확보했다. 개헌 정족수를 손에 쥔 새 여당이 곧바로 국가기관 정비에 나선 것이다.
마요르와 슐리요크의 충돌
마요르 총리는 집권 직후부터 슐리요크에게 자진 사퇴를 요구했다. 슐리요크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마요르는 그를 “오르반의 꼭두각시”라 불렀다. 그리고 헌법적 수단을 동원해 물러나게 하겠다고 예고했다. 이번 파면안은 그 예고의 실행인 셈이다.
왜 이 자리가 문제였나
헝가리 대통령직은 의전상 성격이 강하다. 다만 권한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은 법률 승인권과 헌법재판소 회부권을 가진다. 오르반계 인사가 이 자리를 지키면 새 정부의 개혁 입법을 지연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새 여당이 서둘러 이 자리를 비우려 한 이유다.
Q&A로 짚어보기
Q1. 슐리요크 대통령은 어떤 인물인가요?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법조인이다. 전임 커털린 노바크 대통령의 후임으로 2024년 2월 선출됐다.
노바크는 아동 성범죄 은폐 사건 연루자를 사면해 논란 끝에 물러났다. 슐리요크는 그 빈자리를 이어받은 인물이다.
Q2. 대통령직 자체를 없애는 건가요?
아니다. 직위 자체를 폐지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개헌은 슐리요크의 임기만 즉시 끝낸다. 그리고 의회가 새 대통령을 선출할 길을 연다.
Q3. 서명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나요?
헌법재판소에 회부할 수 있다. 하지만 마요르 총리는 그 경우 즉시 탄핵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탄핵이 시작되면 슐리요크는 자동으로 직무가 정지된다. 결국 서명하거나, 회부해서 탄핵당하거나 둘 중 하나다.
Q4. 오르반 전 총리는 지금 뭘 하나요?
4월 총선 패배 이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의회 의석에도 등원하지 않는다.
표결 당일 그는 헝가리에 없었다. 미국에서 열린 월드컵 결승전을 관전 중이었다. 당내에서는 그의 장기 침묵에 당혹감이 커진다. 당 서열 2위 게르게이 굴리아시는 같은 날 원내대표직에서 사퇴했다.
Q5. 왜 국제적으로 주목받나요?
오르반은 헝가리 밖에서도 상징적 인물이었다. 국가주의·반이민 노선을 앞세운 보수 정치의 얼굴이었고, 미국 보수 진영 일각과도 가까웠다.
그런 그의 정치적 유산이 개헌 한 방으로 빠르게 해체되고 있다. 이 과정은 ‘권력 교체 이후 이전 세력을 어디까지 몰아낼 수 있는가’라는 논쟁으로 번지는 중이다.
양측의 시각
개혁으로 보는 시각
전 대법원장 언드라시 바카는 이렇게 말했다. “1989년부터 2010년까지 헝가리는 법치주의 국가였지만, 그 이후 피데스가 국가기관을 장악해 권위주의 체제를 만들었다.”
그는 그 체제의 견고함을 강조했다. “선거에서 져도 살아남도록 설계된 정교한 권위주의 체제를 해체하기란 지금도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전직 야권 대통령 후보 페테르 로너의 평가도 비슷하다. 그는 “피데스가 스스로 만든 ‘승자독식’ 권력 개념에 이제 자기들이 발목 잡힌 것이 큰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마요르 총리는 이번 조치를 국가기관 정상화 작업의 일환으로 규정한다.
권력 남용을 우려하는 시각
피데스는 표결 전 집단 퇴장하며 반발했다. 티서당이 “독재를 구축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이번 개헌이 정부에 공직자를 자의적으로 해임할 권한을 준다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파면 자체에는 동의한 바카 전 대법원장조차, ‘3선 이상 의원의 재출마 금지’ 조항에는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는 “유권자가 원하는 사람에게 투표할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구조적 우려도 나온다. 3분의 2 의석을 쥔 여당이 개헌으로 전임 세력을 신속히 걷어내는 방식이다. 이는 2011년 오르반 정부가 자신의 3분의 2 의석으로 ‘승자독식’ 헌법을 설계했던 패턴과 닮았다는 것이다.
전망: 왜 중요한가
당장의 관전 포인트는 슐리요크의 선택이다. 남은 5일 안에 서명할지, 헌법재판소로 넘겨 탄핵 정국을 자초할지다.
어느 쪽이든 큰 흐름은 정해졌다. 오르반계 인사가 국가기관에서 물러나는 시점만 앞당겨질 뿐이다.
더 큰 질문은 그다음이다. 마요르 정부는 ‘2~3년 내 신헌법 제정’을 예고했다. 12년 임기 제한이 시행되면 현 피데스 의원 절반 이상이 정치 생명을 잃는다.
이 과정이 ‘적폐 청산’으로 읽힐지, ‘정치 보복’으로 비칠지는 아직 열려 있다. 유럽연합과 국제사회가 이 패키지의 나머지 조항, 특히 반부패 기구의 실제 운용을 어떻게 평가할지도 지켜볼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