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어쩌다 러시아 스파이 소굴이 됐나
러시아가 일본의 허술한 방첩법을 노려 첩보 거점으로 삼았다는 폭로가 나왔다. 우크라이나 전쟁 무기 부품 조달까지 얽히자 다카이치 정부가 전후 처음으로 중앙 정보기관 신설에 나섰다.
도쿄에 있는 러시아 국영 항공사 아에로플로트 지사. 겉으로는 평범한 항공사 사무실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항공사 직원으로 위장한 러시아 정보요원이 일본 내 첩보망을 지휘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가 일본을 “스파이 소굴”로 써 왔다는 폭로다.
무슨 일인가
폭로의 핵심
한 미국 탐사보도가 7월 12일 이 실태를 파헤쳤다. 러시아가 일본을 “스파이 소굴(den of spies)“이자, 우크라이나 전쟁에 쓰이는 부품을 빼가는 핵심 조달 거점으로 삼아 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부품은 이른바 이중용도(군민 겸용) 기술이다. 민간 제품에도 쓰이고 무기에도 쓰이는 부품을 뜻한다.
핵심 원인으로 지목된 건 일본의 허술한 방첩법이다. 간첩을 막는 법이 약하다 보니 모스크바가 일본을 정보 수집과 부품 조달의 거점으로 활용해 왔다는 주장이다.
러시아 무기 90%에 일본이 있었다
가장 충격적인 수치가 여기서 나온다. 우크라이나 정부 추산에 따르면 러시아산 미사일과 드론의 90%에 일본산 부품이 들어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 쏘는 무기 열 발 중 아홉 발에 일본 부품이 박혀 있다는 것이다.
부품이 흘러 들어가는 경로도 드러났다. 러시아로의 직접 수출은 서방 제재로 막혀 있다. 그래서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스리랑카 같은 중개국과 중개 기업을 거쳐 부품이 러시아로 우회 반입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방에서 쫓겨난 스파이들이 향한 곳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뒤, 서방 각국은 수백 명의 러시아 스파이를 추방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흘러 들어간 곳이 일본이라는 게 이번 보도의 주장이다.
이유는 두 가지로 꼽힌다. 하나는 일본의 번성한 첨단기술 산업이다. 빼갈 기술이 많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생긴 허술한 방첩법이다.
일본 정부의 반응
보도 다음 날인 7월 13일 월요일, 일본 정부가 공개적으로 입을 열었다.
기하라 미노루(木原稔) 관방장관이 나섰다. 관방장관은 총리 직속으로 정부 발표와 대변인 역할을 하는 일본 내각의 핵심 각료다. 그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안보 환경 속에서, 핵심 정보 획득 등 일본의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외국의 정보활동에 대응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기하라 장관은 보도 내용 자체에 대한 직접 논평은 피했다. 다만 도쿄가 “이 문제를 더 엄정하게 다뤄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일본 국회가 올해 이미 분산돼 있던 정보 활동을 조율할 새로운 국가 기구를 세우는 법안을 통과시켰다고 덧붙였다.
이 사건의 배경
역사적 배경
일본은 왜 방첩에 약할까. 뿌리는 8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정보와 안보 기구의 힘을 스스로 묶어 두는 체제를 유지해 왔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다시 강한 정보 조직을 갖는 데 대한 안팎의 경계 때문이었다.
그 결과 현재의 허술한 방첩법이 남았다. 일본은 서방 동맹국 가운데서도 간첩을 막는 체계가 유독 약한 나라로 꼽혀 왔다. 이번 폭로가 아프게 파고든 지점이 바로 이 오랜 빈틈이다.
이해관계 구도
러시아의 셈법은 분명하다. 서방 제재로 무기 부품을 정상 경로로 살 수 없게 되자, 일본을 우회 통로로 삼았다는 것이다.
일본이 노려진 이유도 앞뒤가 맞는다. 첨단 부품이 넘치는 기술 강국인데, 정작 이를 지킬 방첩망은 헐겁다. 스파이 입장에서는 물건 많고 경비 허술한 창고인 셈이다.
일본 정부와 집권 자민당은 이제 이를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중앙집권화된 정보기관 신설로 대응에 나선 이유다.
왜 지금인가
직접적 계기는 7월 12일의 그 탐사보도였다. 러시아의 일본 내 첩보망과 부품 조달 실태를 낱낱이 공개하자, 일본 정부가 하루 만에 공개 반응을 내놨다.
같은 날, 또 다른 보도가 더 큰 그림을 전했다. 사나에 다카이치(高市早苗) 일본 총리가 러시아와 중국의 위협에 맞서 중앙집권화된 정보기관을 만들고 있으며, 여기에 서방 동맹국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갖지 못했던 유형의 정보기관이라고 이 보도는 표현했다.
Q&A로 짚어보기
Q1. “이중용도 부품”이 정확히 뭔가요?
민간과 군사 양쪽에 모두 쓰이는 기술 부품을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떤 반도체 칩은 세탁기에도 들어가고 미사일 유도장치에도 들어간다. 이런 부품은 순수 무기가 아니라서 수출 규제의 그물을 빠져나가기 쉽다. 러시아가 노린 지점이 바로 이 회색지대다.
Q2. 일본이 러시아에 부품을 직접 판 건가요?
그렇지 않다. 러시아로의 직접 수출은 제재로 막혀 있다.
문제는 우회로다.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스리랑카 같은 제3국의 중개 기업을 거쳐 부품이 러시아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겉으로는 다른 나라로 가는 정상 거래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식이다.
Q3. 일본 방첩법은 왜 그렇게 약한가요?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이 배경이다.
전후 일본은 정보와 안보 기구의 권한을 스스로 제한하는 길을 택했다. 그 제약이 지금까지 이어져 방첩법이 허술한 상태로 남았다는 것이다. 이 빈틈이 이번 사태의 구조적 원인으로 지목된다.
Q4. 새 정보기관은 어떤 모습인가요?
세부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확인된 사실은 두 가지다. 일본 국회가 분산된 정보 활동을 조율할 새 국가 기구 설립 법안을 통과시켰다는 것. 그리고 다카이치 총리가 서방 동맹국의 도움을 받아 중앙집권화된 정보기관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 기관명이나 규모, 예산, 어느 동맹국이 돕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양측의 시각
이 사안은 한국식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아니다. 일본 안에서 “안보를 강화하자”는 목소리와 “전후 체제의 무게를 신중히 보자”는 시선이 부딪히는 문제다.
안보 강화에 힘을 싣는 쪽
정부와 집권 자민당은 방첩 강화와 정보기관 신설에 적극적이다.
기하라 관방장관의 발언이 이 입장을 대표한다. 외국의 정보활동에 “대응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며 “더 엄정하게 다뤄야 한다”고 했다.
여당 안의 위기감은 더 직접적이다. 자민당 소속 의원인 시오자키 아키히사(塩崎彰久)는 전직 변호사로 산업스파이 사건을 기소한 경력이 있다. 그가 남긴 말은 짧고 무겁다.
“우리는 이 상황에 대해 위기의식을 갖고 있다.”
이들에게 이번 폭로는 미룰 수 없는 경고음이다. 무기 부품이 새어 나가고 첨단기술이 표적이 되는 현실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후 체제의 무게를 짚는 쪽
반대편의 목소리는 특정 정치인의 반박이라기보다, 일본이 짊어져 온 역사적 맥락에서 나온다.
일본은 패전 이후 정보와 안보 기구의 힘을 스스로 제한해 왔다. 그 절제가 전후 일본의 정체성 일부이기도 했다. 이번 정보기관 신설은 그 오랜 체제를 바꾸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즉 방첩 강화의 필요성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지만, 강한 중앙 정보기관을 다시 세우는 일이 어떤 견제 장치와 함께 가야 하는지를 따져 봐야 한다는 신중론이다.
다만 이번 사안에서 이 신중론을 대표해 공개적으로 나선 인물이나 단체의 발언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현재로선 두 보도가 공통으로 짚은 구조적, 역사적 배경이 이 시선의 근거다.
전망: 왜 중요한가
이 사건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장으로 이어지는 실이 일본을 관통하고 있다.
지켜볼 지점은 몇 가지다. 첫째, 새 정보기관의 실체다. 기관명도 규모도 예산도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전후 처음으로 세워지는 중앙 정보기관이 어떤 권한과 견제 장치를 갖추느냐가 관건이다.
둘째, 우회 조달망의 차단 여부다. 베트남과 우즈베키스탄, 스리랑카를 거치는 경로가 실제로 막힐지, 아니면 또 다른 우회로가 뚫릴지가 남은 물음이다.
셋째, 전후 체제의 전환이 부를 파장이다. 스스로 힘을 묶어 온 나라가 다시 정보기관의 빗장을 여는 순간, 그 무게는 일본 안팎에서 오래 논의될 것이다.
폭로 한 편이 던진 파문은 이제 시작 단계다. 도쿄가 이 문제를 정말로 “더 엄정하게” 다루는지는 앞으로의 행동이 답할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