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광산 전시장에 아직도 빠진 한 단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사도광산의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가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며 일본에 전체 역사를 반영하라고 다시 권고했다. 결정문은 이달 부산 회의에서 확정된다.
사도광산 어느 길목. 조선인 노동자들이 머물던 기숙사터로 가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새로 섰다. 하지만 그 노동이 “강제”였다는 사실은, 인근 박물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이정표는 10여 개나 늘었는데, “강제성”이라는 단어 하나는 여전히 빠져 있다.
무슨 일인가
유네스코가 다시 꺼낸 말
15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결정문 초안을 공개했다. 지난해 12월 일본이 낸 보존현황보고서를 검토한 결과다.
결론은 분명했다. 일본이 사도광산의 “전체 역사”를 충분히 알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체 역사란 조선인 강제노동을 포함한다.
세계유산위는 “해설·전시 전략에서 진전은 있었지만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광산 개발의 모든 시기에 걸친 유산의 전체 역사를 종합적으로 반영하도록 권고한다”고 밝혔다.
진전과 미흡 사이
진전으로 인정받은 부분은 있다. 일본은 2026년 상반기 사도광산 안에 조선인 노동자 기숙사터, 공동취사장 같은 시설을 찾아가기 쉽게 이정표 10여 개를 새로 세웠다.
그러나 위원회의 판단은 냉정했다. “광산 개발 모든 기간의 전체 역사를 전시 시설이 어떻게 다루는지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고 못 박았다.
숙제도 남겼다. 일본은 이행 상황을 세계유산센터에 정기 보고해야 한다. 2027년 12월 1일까지 이행 보고서를 내야 한다. 이 보고서는 2028년 제50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다시 검토된다.
부산에서 확정된다
이번 결정문은 오는 19일부터 29일까지 부산에서 열리는 제48차 세계유산위원회 기간에 확정될 예정이다. 사도광산 안건은 그중 20일에서 23일경 논의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위원국 21개국이 회람한 뒤 이견이 없으면 합의로 채택된다.
이 사건의 배경
조선인 1,519명이 끌려간 금광
사도광산은 니가타현에 있는 금광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노동자가 강제로 동원돼 가혹한 환경에서 일한 곳이다. 태평양전쟁이 본격화하면서 전쟁 물자를 캐내는 광산으로 주로 쓰였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이곳에서 노역한 조선인은 1,519명으로 알려졌다.
등재를 둘러싼 거래
일본은 2022년과 2023년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했다. 2024년 6월, 세계유산위 자문기구는 등재 보류를 권고했다. 강제동원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알리는 시설을 세우라는 조건도 달았다.
이후 한일 양국은 합의를 맺었다. 한국이 등재에 찬성하는 대신, 일본이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를 설명하는 전시물을 인근 박물관(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두기로 한 것이다. 이 박물관은 과거 사도광산 관리사무소로 쓰였다.
2024년 7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제46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을 포함한 21개 위원국 전원 찬성으로 등재가 확정됐다.
빠진 단어, 시작된 논란
문제는 등재 직후 터졌다. 일본은 박물관에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는 사실만 전시했다. 정작 “강제성”을 나타내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이 표현은 지금까지도 빠져 있다.
정부는 항의의 표시로 움직였다. 일본이 강제노역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자, 2024년과 2025년 일본이 주최한 추도식에 불참하고 별도의 추도식을 열었다.
Q&A로 짚어보기
Q1. 이번 결정문이 왜 의미가 있나요?
등재 이후 검토 단계에서 보고서 제출을 또 요구하는 일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한 외교 소식통은 “세계유산 등재 이후 검토 단계에서 보고서 제출을 또 요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전했다. 이어 “일본으로선 한국과 이 문제를 계속 협의해야 하는 과제가 생긴 것”이라고 했다.
Q2. 한국 정부는 그동안 뭘 했나요?
외교부는 올해 사도광산 현지 모니터링을 실시했다. 두 차례 한일 국장급 협의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사도광산 해석·전시에 강제동원 문제를 명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유네스코 사무국과도 계속 소통했다.
Q3. 일본이 권고를 안 지키면 어떻게 되나요?
당장 큰 불이익은 없다. 권고를 이행하지 않아도 명확한 불이익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등재 취소 가능성도 낮다. 전체 세계유산 1,248건 가운데 등재가 취소된 사례는 단 3건뿐이다. 그마저도 유산 훼손 같은 물리적 사유에 국한됐다.
Q4. 그럼 한국이 쓸 수 있는 카드는 없나요?
있다. 한국은 내년(2027년)까지 세계유산위 위원국 지위를 유지한다. 표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일본이 2027년 12월까지 낼 이행 보고서가 2028년 다시 도마에 오른다. 압박을 이어갈 통로는 남아 있다.
Q5. 비슷한 전례가 있었나요?
있다. 일본은 2015년 등재된 군함도(하시마 탄광)와 관련해서도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를 제대로 전시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양측의 시각
일본의 이행이 미흡하다는 시각
한국 정부는 강제동원을 포함한 “전체 역사”가 사도광산 현장에서 충분히 알려져야 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지켜 왔다.
외교부 당국자는 14일 기자들과 만나 “우리 정부는 사도광산 관련 강제동원을 포함한 전체 역사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고 밝혔다. 이어 “일본의 관련 권고 이행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의 일관된 입장이 결정문에 반영된 것으로 본다”고 했다.
앞으로의 방침도 분명히 했다. “일본 측이 세계유산위원회 결정과 등재 당시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도록 유네스코 사무국 및 관계국과 긴밀히 협의하면서 필요한 노력을 지속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번 권고가 한국 정부의 입장에 힘을 실어준 것으로 평가된다.
일본 측이 내세우는 진전
일본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2026년 상반기 이정표 설치 등 일부 조치를 취했고, 세계유산위로부터 “진전”으로 인정받았다.
다만 핵심은 여전히 비어 있다. 박물관 전시물에서 “강제성”을 나타내는 표현은 지금도 쓰지 않는다. 일본이 강제노동 사실 자체를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해 왔다는 점은 여러 보도에서 확인된다.
이번 사안을 두고 일본 정부가 내놓은 공식 반박 성명이나 코멘트는 확인되지 않았다.
전망: 왜 중요한가
첫 관문은 부산이다. 오는 19일부터 열리는 제48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결정문이 실제로 채택될지가 1차 관문이다.
진짜 시험대는 그다음이다. 일본이 2027년 12월까지 낼 이행 보고서에 “전체 역사”를 어떻게 담을지가 관건이다. 그 보고서는 2028년 다시 검토된다.
지켜볼 지점은 분명하다. 아이카와 향토박물관 전시에 “강제성”을 나타내는 표현이 들어갈까. 한일 국장급 협의가 실제 전시 변화로 이어질까. 위원국 지위를 가진 한국이 남은 시간 동안 어떤 지렛대를 쓸까.
안내판은 늘었지만, 그 길이 “강제노동”으로 이어졌다는 문장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