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를 비판하던 남자가 선거 없이 총리가 된다
키어 스타머 총리가 취임 2년 만에 물러난다. 후임 앤디 버넘은 총선도, 당내 경선 토론도 거치지 않고 다우닝가에 입성한다. 지난 10년 새 일곱 번째 영국 총리다.
영국 하원. 키어 스타머 총리가 마지막 답변을 마치자 의원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2024년 노동당을 14년 만에 집권으로 이끈 남자가, 단 2년 만에 이렇게 무대에서 내려온다.
“이것이 내 정치 여정의 끝이다.” 스타머는 담담하게 말했다.
취임은 압승, 퇴장은 2년. 그런데 뒤를 잇는 남자는 선거를 단 한 번도 치르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스타머의 마지막 날
키어 스타머 총리는 영국 집권 노동당(Labour)을 이끄는 정부 수반이다. 2026년 7월 15일 수요일, 그는 하원에서 마지막 총리 질의응답(PMQs)을 치렀다. 총리가 매주 의원들의 질문을 받는 자리다.
이날 스타머는 후임을 향한 당부를 남겼다. “나는 이 노동당 정부가 성공하길 바란다. 우리나라가 성공하길 바란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요청이 있으면 사적으로 지지하겠지만, 요청이 없으면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겠다.”
물러나는 이유는 스캔들과 정책 번복이었다. 지난달인 2026년 6월, 스타머는 수개월간의 사퇴 압박 끝에 사임을 발표했다. 재임 기간은 2년에 그쳤다.
하루 만에 굳어진 후임
후임은 사실상 정해졌다. 앤디 버넘이다. 노동당 리더십 경선 첫날, 그는 당 소속 하원의원 403명 가운데 322명의 지명을 받았다.
경선에 나서려면 최소 81명의 추천만 있으면 된다. 버넘은 그 요건을 네 배 가까이 넘겼다. 사실상 경쟁자가 없는 상태다.
노동당 의원 403명 중 322명이 하루 만에 그를 밀었다.
선거 없는 승계
일정은 빠르게 짜여 있다. 7월 17일 금요일 노동당 대표로 공식 확정되고, 7월 20일 월요일 찰스 3세 국왕이 그를 총리로 임명한다.
여기서 핵심이 있다. 이 교체에는 총선이 없다. 영국은 의원내각제 국가다. 집권당은 국민 투표를 다시 묻지 않고도 당 대표, 곧 총리를 바꿀 수 있다. 다음 총선은 2029년으로 예정돼 있다. 버넘은 유권자에게 표를 받지 않은 채 다우닝가 10번지에 들어선다.
이 사건의 배경
앤디 버넘은 누구인가
버넘은 한국 독자에게 낯선 이름이다. 56세, 잉글랜드 북서부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통신회사 엔지니어, 어머니는 리셉셔니스트였다. 10대에 노동당에 입당했고 케임브리지대를 나왔다.
2001년 하원의원에 처음 당선됐다.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 정부에서 문화부 장관과 보건부 장관 같은 요직을 지냈다. 2010년과 2015년 두 차례 노동당 대표에 도전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전환점은 2017년이었다. 그는 하원을 떠나 그레이터맨체스터 시장에 당선됐다. 이후 3선, 9년간 지역을 이끌었다. 분절돼 있던 맨체스터 버스 체계를 공영화한 “Bee Network” 사업이 대표 치적으로 꼽힌다.
또 하나. 1989년 리버풀 축구팬 97명이 숨진 힐스브러러 참사의 진상규명 운동에 그는 오래 앞장섰다. 경찰의 초기 은폐에 맞서 유가족 편에 선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정치 노선은 스타머보다 왼쪽으로 평가된다. 스스로 “맨체스터리즘”을 전국으로 넓히겠다고 말해왔다. 정당보다 사람과 지역을 앞세우는 지역분권 노선이다. 사회주택 확충, 청년 고용, 에너지 요금과 철도 요금 인하를 우선순위로 내걸었다.
10년 새 일곱 번째 총리
버넘이 취임하면 지난 10년간 영국의 일곱 번째 총리가 된다. 그만큼 총리 교체가 잦았다.
그가 하원에 돌아온 건 불과 한 달도 안 됐다. 지난 6월 19일 메이커필드 보궐선거에서 54.8%를 얻어 우파 포퓰리즘 정당 리폼 UK(Reform UK) 후보를 꺾었다. 9년간 지역 시장을 하다 중앙 정치로 복귀한 셈이다.
트럼프와 부딪혀온 남자
버넘이 세계의 주목을 받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여러 차례 공개 비판해온 인물이다.
2025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트럼프의 재집권을 과거 영국을 뒤흔든 리즈 트러스 전 총리에 빗댔다. “리즈 트러스가 영국에 안긴 불안정을, 트럼프가 미국과 세계에 안기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대응을 두고는 트럼프의 여러 결정을 “도리에 어긋난다”고 표현했다.
2021년 1월 6일 미 국회의사당 폭동 때는 소셜미디어에 이렇게 썼다. “트럼프를 상대해준 영국 정치인이라면 지금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렇다고 미국과의 단절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스타머 총리가 트럼프와 실무 관계를 유지하려 한 노력을 지지했다. “당연히 이 관계는 영국에 중요하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을 무조건 따라가야 할 정도는 아니다.”
트럼프의 반응은 냉담했다. 지난 6월 버넘에 대해 아는 게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모르겠다. 어느 마을의 시장이었던 것 같다.” 이어 버넘이 “매우 진보적”이라고 들었다며, 북해 석유 시추 확대에 반대할 것이라 예상하고는 “영국은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Q&A로 짚어보기
Q1. 총선 없이 총리가 바뀌는 게 정말 가능한가
가능하다. 영국은 대통령제가 아니라 의원내각제다. 국민이 총리를 직접 뽑지 않는다. 총선에서 다수당이 된 정당이 자기 당 대표를 총리로 세운다.
그래서 집권당은 임기 중에 대표를 교체하면 총선 없이 총리도 바뀐다. 이번이 바로 그런 경우다. 다음 총선은 2029년으로 예정돼 있다.
Q2. 버넘은 정말 경쟁자가 없나
사실상 그렇다. 경선 첫날 노동당 의원 403명 중 322명이 그를 지명했다. 출마에 필요한 최소 요건은 81명이다. 다른 후보가 비집고 들어올 공간이 거의 없다.
Q3. 버넘과 트럼프 사이는 어떤가
껄끄럽다. 버넘은 트럼프를 오래 비판해왔고, 트럼프는 그를 “어느 마을 시장” 정도로 깎아내렸다. 다만 버넘도 미국과의 관계 자체를 끊자는 쪽은 아니다. 관계는 중요하되 무조건 따라가지는 않겠다는 실용 노선을 밝혀왔다.
Q4. 스타머는 왜 2년 만에 물러나나
스캔들과 실책, 정책 번복이 쌓였다. 수개월간 사퇴 압박을 받은 끝에 지난 6월 사임을 발표했다. 2024년 압승으로 집권했지만 재임은 2년에 그쳤다.
Q5. 버넘은 어떤 정책을 펴려 하나
사회주택 대규모 확충, 청년 고용, 에너지와 철도 요금 인하를 앞세워왔다. 지역분권과 낙수효과 반대가 그의 색깔이다. 스타머보다 왼쪽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양측의 시각
비판하는 시각
가장 큰 문제 제기는 “검증 없는 총리”다. 한 보수 성향 싱크탱크 이사는 버넘을 두고 “최근 들어 가장 검증을 덜 받은 채 취임하는 영국 총리”라고 했다. 총선도, 당내 리더십 토론도 거치지 않았고, 지난 총선 후보조차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버넘이 급진 좌파 어젠다를 밀어붙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구체적으로 부유세 도입, 선거제도 개편, 사회주택 대규모 확충, 그리고 이스라엘 같은 기존 우방에 대한 공격을 꼽았다.
우파 포퓰리즘 정당 리폼 UK의 나이절 파라지 대표는 조기 총선을 요구했다. “지난 10년간 다우닝가에서 벌어진 의자 뺏기 게임에 국민들은 지쳤다.” 그는 “버넘은 아무런 국민적 위임 없이 취임한다”며 “그의 정책이 뭔지조차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제1야당 보수당의 케미 베이드녹 대표는 스타머의 마지막 PMQs에서 먼저 농담을 던졌다. “그는 내가 우리 당을 통제 못 한다고 오래 비웃었다. 정작 자기 당 평의원들에게 신경 썼어야 했다.” 그러고는 정색했다. “총리를 바꾼다고 만병통치약이 되는 건 아니다. 노동당의 곤경은 이제 시작일지도 모른다.”
지지하는 시각
지지 측은 압도적 당내 신임을 근거로 든다. 버넘은 노동당 의원 403명 중 322명의 지명을 받았다. 주요 노동조합들의 지지도 확보했다. 사실상 만장일치에 가까운 추대라는 것이다.
물러나는 스타머 본인이 후임의 성공을 공개적으로 빌었다. “나는 이 노동당 정부가 성공하길 바란다. 우리나라가 성공하길 바란다.” 이날 하원의 다수 의원이 스타머에게 기립박수를 보내며 공을 인정했다.
버넘의 이력도 힘을 싣는다. 그레이터맨체스터 시장 3선, 버스 공영화 성과, 힐스브러러 참사 유가족 곁을 지킨 활동은 지역 행정 능력과 약자 대변 이미지를 뒷받침한다. 트럼프에 비판적이면서도 관계를 끊지는 않는 실용 노선도 지지 측이 내세우는 대목이다.
전망: 왜 중요한가
지켜볼 지점은 세 가지다.
첫째, 정통성 논란이다. 유권자 표 없이 취임하는 총리에게 야당은 계속 조기 총선을 요구할 것이다. 이 압박을 버넘이 어떻게 넘길지가 초반 국면을 가른다.
둘째, 정책의 방향이다. 스타머보다 왼쪽에 선 그가 부유세와 사회주택 같은 어젠다를 실제로 얼마나 밀어붙일지, 아니면 속도를 조절할지가 시험대다.
셋째, 미국과의 거리다. 트럼프를 비판해온 총리와 트럼프 행정부가 어떤 관계를 맺을지가 남았다. 버넘은 관계는 유지하되 끌려가지는 않겠다고 했다. 말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곧 드러날 것이다.